조선이 개항하면서 서양의 의약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서양 의약을 맨 처음 경험한 조선인은 누구였을까? 조선인으로 서양의 의술과 약물을 가장 먼저 경험한 무리는 1876년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 1831~1894년)가 인솔하는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된다. 김기수를 위시한 수신사 일행 75명은 ‘1876년(고종 13) 4월 29일(음력)에 부산을 떠나, 5월 7일 동경에 도착하여 원료관(遠遼館)에 20여 일 동안 머물다가 5월 27일에 동경(東京)을 떠나 윤5월 7일 진시(辰時)에 부산포에 돌아와 숙박하였으며, 일본 외무경(外務卿)의 회답 서계(書契) 및 공문 1통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문서 1통을 해조(該曹)의 당상에게 올려보냈고, 역관(譯官) 현석운(玄昔運)은 임소에 뒤쳐져서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주1)
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수신사 일행은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에 승선하여 부산을 출발하여 시모노세키(下關)-고베(神戶)를 경유하여 요코하마(橫濱)에 닿았고 요코하마에서 일본 외무성 관리의 마중을 받고 특별 열차로 동경(東京)에 이르렀다. 수신사의 일본행에는 대군의(大軍醫) 시마다 슈우미(島田修海, 1842~1903년)가, 귀국길에는 대군의 사네요시 야스즈미(實吉安純, 1848~1932년)가 일행을 호행(護行)하였는데 서양의학을 습득한 이들은 서양 의술과 양약으로 수신사 일행의 건강을 보살폈다. 사네요시는 배 안에서 김기수의 요청으로 의학에 관심이 많은 수행원 박영선(朴永善)에게 수권의 서양 의학서를 주고, 150인분의 두묘(痘苗)와 서양 약품 키니네(鷄, 학질 치료제, 상품명 금계랍) 등을 건네는 등 후의를 보였다.주2) 이런 문헌에 근거하여 서양의 의술과 약품을 처음 경험한 사람들은 조일수호조약 체결[1876년 2월 27일(음2월 3일)] 이후 일본을 다녀온 수신사 일행이라 생각된다.
1876년 조선의 문호가 열리자, 일본인의 왕래가 늘어나며 개항지에 일본인 거류지가 조성되었고, 뒤를 이어 개항장에 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의 건강을 보살필 일본인 병원들이 생겨났다. 부산 지역에서는 동래에 왜관이 있던 곳이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는데, 여기에 1877년 제생의원(濟生醫院)이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880년 원산에 생생병원(生生病院)을, 1883년에는 인천과 서울에 영사관 부속병원과 일본관 의원이 각각 생겼다.주3) 일본 외무성 관할 시설인 부산 제생병원은 1877년 2월에 설립되었고,주4) 일본 해군 소속 대군의(大軍醫) 야노(矢野義徹)가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이 의료기관은 곧 일본 해군성의 관할로 바뀌었다. 제생병원은 비록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의료 시설이긴 하나,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 의술을 펼 수 있는 곳으로, 당시로는 일본에도 흔치 않은 최신식의 의료기구와 약품을 갖춘 서양식 병원이었다.주5) 제생병원은 일본 거류민에게만 의료를 실행하지 않고 한국인의 환심을 얻을 목적으로 한국인 환자도 진료하였는데, 내원하는 일본인의 비중이 높지만, 상당수의 조선인 환자도 제생병원을 이용했다.주6) 1) 1880년 5월에 개원한 원산의 생생병원도 부산 제생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에 대한 진료는 물론 한국인도 진료했다. 이렇듯 일부 조선인에 국한되긴 했지만, 조선 사회는 개항지에 설립된 일본 의료 시설을 통하여 서양 약을 경험하면서 서양 약의 존재를 인식하고 효능을 경험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 때에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년)이 펼친 의료활동을 계기로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인지한 조선 왕실은 알렌을 왕실 전의(王室典醫)로 삼는 한편, 알렌의 건의를 받아드려 1885년 4월 재동(齋洞)에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처음에는 광혜원이라 함)을 설립하였다.주7) 2) 조선 정부와 미국 해외 선교부의 합의로 설립된 제중원은 행정과 재정상의 운영은 조선 정부가 관장하고, 치료 및 의사의 경비 및 의학교육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는 이원 체제의 성격을 지녔다.주8) 제중원의 의료활동의 총책임자인 알렌은 의료에 필요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미국에서 들여왔다.주9) 3,4) 그뿐만 아니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미국 감리교에서 파견한 스크랜톤의 시병원(施病院)도 의약품과 의료기구를 미국에서 들여왔고, 양약을 무료로 환자에게 배포하였다.주10) 이러한 외국인의 의료행위로 인하여 조선인에게 서양 의술(양약의 활용을 포함)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880년대 후반, 조선에서 신문이 발간되자, 서양 약품의 광고가 신문 지면에 등장하였는데,주11) 조선인들은 의료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서양 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5)
무병장수는 인류가 부단하게 추구하고 유지해온 원초적 염원이다. 태고로부터 의(醫)와 약(藥)은 이런 염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람의 건강권 유지에 요구되는 의료활동의 핵심은 의학 기술과 약품의 활용에 있기에 의(醫)와 약(藥)은 자동차의 양 바퀴처럼 항상 밀접하게 협조하는 가운데 각각의 역할과 위상을 지켜왔다. 의약품주12)은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특수한 물질인데, 이러한 특수한 용도를 지닌 물질인 약은 약에 대한 전문지식을 소유한 사람(약사, 약제사)주13)에 의하여 수요자에게 제공되었다.6.7)
개항과 더불어 서양에서 유입된 약물 관련 학문(근대 약학)의 면모는 본초학을 근간으로 하는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 동양의 약물학과는 사뭇 다르다. 서양에서 근대약학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서서히 전개되어 18~19세기에 이르러 기초가 잡혔고 19~20세기에 이르러 급속히 발달하였다. 간단히 서술하면 르네상스 이후 과학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발전에 힘입어 의약학 분야에서도 신비한 철학적 요소가 차츰 제거되기 시작했다. 과학의 분화가 이루어지던 18세기 후반~19세기 초에 약학이 응용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면서 근대적 약학이 발아하였다. 실험, 실증, 검증을 거치면서 자연과학의 여러 학설이 나온 것처럼 약학(藥學)도 관찰, 화학실험을 통한 감식, 확인을 거쳐 실증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주14) 8) 근대약학의 성격이나 함의는 다양하게 논의될 수 있으나, 보다 핵심적 요소를 요약하면,
1. 서양의 근대약학은 실증학문으로 다양한 자연과학 분야(식물학, 동물학, 화학, 물리학, 미생물학 등)와 연계된 종합적 학문이며, 약학의 근간은 약효 물질을 단리형으로 확보하거나 합성하는 화학이다. 따라서 약효 성분의 규격화, 균등화와 용량의 적정화가 가능해졌다.
2. 약품 생산이 자본과 결합하며, 기계 사용으로 대량 생산의 제약업이 전개되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의 약물 제형이 등장했다. 제약의 산업화는 소비의 보편화, 대중화를 추동하였다. 산업시대에 등장한 광고업은 약 소비의 보편화, 대중화를 가속 시켰다.
3. 제약업자와 약에 대한 전문지식을 지닌 약제사를 양성하기 위한 약학교육 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으며
4. 전문 약학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약사면허 제도는 약사의 조제권 같은 전문성에 대한 권리 보장과 더불어 동시에 국민의 건강권을 수호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
5. 국민국가를 지향했던 근대적 사조에서 국가는 국민이 사용할 의약품의 제조 및 관리에 관한 사항을 담은 ‘약전’(약에 관한 법전)의 편찬을 통하여 국가의 관리 아래 두었다.
이러한 근대약학의 성격 가운데, 체계적 교육을 통하여 약을 다루는 전문인 양성, 약제사 면허제도를 통한 약제사의 전문성과 권리 인정, 국가의 약전 편찬 등은 근대 국가의 형성 과정과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국가 권력이 개입하여 국가구성원의 건강권과 직결되는 약사(藥事)에 대한 총체적 사안을 약율(藥律)로 정하는 것은 근대 국가의 필수적 기능 및 역활로, 이는 근대약학의 여러 특성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양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근대약학에 대한 개념 또는 함의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서술한 것은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20세기 말, 일본이나 조선이 서양의 근대약학을 접하면서 보인 수용 자세 및 제도의 수립 등에 대하여 잘 통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갑오년(1894년)에 개혁을 단행하면서 의사(醫事), 약사(藥事) 분야에 있어서는 서양의 의약 제도를 도입하며 그를 바탕으로 근대적 의료 행정과 더불어 의·약 교육을 추진·시행하고자 하였다.주15) 조선정부의 위생국 의무과에 약제사의 업무와 매약에 관한 감독 관리 사항을 두고 의약품의 품질을 분석, 관리하기 위하여 제약사, 약제사의 개업 시험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의·약이 강하게 전습되어 온 조선의 의·약계에 새로운 서양의 의·약 제도의 도입을 추진하자, 기존의 한의·약계가 강하게 반발함으로 서양 의·약학 제도의 도입이 상당히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한편 서양의 의약 제도를 이해하는 전문인력이 없어서 국가시험을 통한 약제사를 확보하려던 계획만 추진 되었을 뿐, 시행되지 못했다.주16)
근대 국가를 지향하던 조선 사회에 처음으로 서양 약학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유세환(劉世煥, 1876~1917년)이다. 유세환은 1893년 관립 일본어 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습득한 후, 1897년 도일하여 도쿄약학교(東京藥學校)주17)에 들어가서 1900년에 졸업했다. 약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도쿄의과대학 선과(選科)에서 2년 동안 의과 과목을 배우고는 1902년 귀국하였다. 조선에 양약이 유입된 지 20여 년 만에 양약(洋藥) 지식을 가진 조선인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1903년 내부 소속 광제원위원(廣濟院委員)을 시작으로 철도원 주사(鐵道院主事) 판임 6등(1904년 7월), 의학교 주임교관(醫學校奏任敎官) 주임 6등, 유행병 예방 위원, 육군의 2등 및 1등 약제관(1906년)으로 활동했다. 유세환은 1907년에 대한의원 교관, 1908년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약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는데,주18) 1910년 8월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며 부속 의학교를 폐지될 때까지 그는 약학교육을 수행했다.주19)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의 폐쇄로 약학과 교수직을 잃은 유세환은 종로 3가에서 인수당(人壽堂)약국을 하다가 1917년 1월 타계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에 약률(藥律)을 제정·공포하면서주20) 조선약제사면허를 발부하기 시작했는데,주21) 도쿄약학교(東京藥學校)에서 2년간 수학한 유세환이 귀국 후 대한제국의 약제관으로 봉직하였지만, 한일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약제사면허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유세환의 타계 시점까지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 약제사면허를 받은 사람이 모두 6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에 주소를 둔 일본인이었다.주22) 유세환의 타계로 조선 반도에는 정규 약학교육을 받은 조선인이 한 명도 없었다. 한편, 도쿄약학교(東京藥學校)에서 2년간 야간 과정을 거쳐 약종상 자격을 얻은 조용원(趙龍元)은 1919년 봄, 서대문 근처 교남동에 활명당약방을 개설하여 서양 약을 취급했다.주23) 1) 한국에서 통치권력으로부터 약제사면허를 받은 조선인이 등장한 것은 1921년 봄부터였다.주24)
이는 1918년 6월, 2년제 교육과정의 조선약학교가 설립되어 서구식 약학교육을 시행하여 1920년 5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듯 1920년대 접어들기까지 조선반도에서 근대적 약학교육을 받고 약제사 자격을 획득한 한국인은 없었다. 하지만, 1910년대에 미국에서 이관영(李觀泳)이란 평안남도 순천 출신의 한국인이 관립 약학대학에서 약학과 화학을 공부하고 약제사면허를 획득하였는데, 그는 미국 약제사면허를 받은 첫 번째 한국인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약제사라는 호칭을 얻은 것이다.
이 글은 1905년 봄, 도미하여 콜로라도, 네브라스카 주 등지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 시카고 약학대학(오늘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약학대학)에 진학하여 1916년 9월 제약사·화학사 과정을 마친 이관영(李觀泳, 1884년 2월 5일~1944년 1월 18일)에 관한 것이다. 우선 이관영은 어떠한 생활 배경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에 갔으며, 십 수년간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그의 모습을 우선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후 선진 약학교육을 받고 약제사·화학자로서 입신한 그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 돌아와서 보낸 약학도, 약제사로서의 삶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연구에 활용한 사료는『고종실록』,『고종시대사』,『조선총독부관보』등의 관찬 사료, 일본 식민기에 발행된 다양한 국내신문 및 재미 한인 신문 자료,『동아일보』,『매일신보』,『매일경제』,『신한민보』,『부산일보』,『조선일보』,『황성신문』,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조선약학교 학적부』,『1923~1924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연례보고서』,『192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일람』,『1925~26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일람』,『1931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일람』,『The Cooperating Board for Christian Education in Chosun』,『The Year Book of School of Pharmacy Alumni, University of Illinois, 1915』등과 다수의 연구서와 논문이다.
이관영은 평안남도 순천의 유지로 경제인, 문화인, 육영사업가, 사회사업가의 명망을 지닌 이희신(李喜信)의 아들로 1884년에 태어났다.주25) 청년 이관영은 순천 시무학교(時務學校)주26)에서 영어를 배운 후 1905년 초에 도미하여 워싱톤에 도착했다.주27) 그는 워싱톤에 머물면서 미국으로 여행하는 동안에 느낀 감정을 『황성신문』에「이천만동포의 감정」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다. 동년 9월에 이관영의 삼종숙인 10대 소년 이희경(李喜儆, 1890~1941년)주28)도 도미하여 워싱톤에서 이관영과 합류하였다.주29) 곧 이관영과 이희경은 생활지를 콜로라도 덴버로 옮겼고 이후 서로 의지하며 타국에서 동고동락하였다. 이관영은 콜로라도 한인사회를 이끌던 박용만, 박장현과 더불어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1908년 7월 11일~14일)하고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주30)의 창설에 관여했다. 이희경과 이관영은 박용만(朴容萬, 1881~1928년)주31)이 주관한 네브라스카 주에 있는 커니(Kearney) 한인소년병학교(1909~1914년)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주32)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훈련은 장래의 대한독립운동을 염두에 두고 실행된 것이다. 이관영은 네브라스카에서 중학교를 다녔다(『신한민보』, 1909년 10월 7일). 오하이오에서 중학교와 웨슬리안대학에서 수학한 이희경이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할 때(1911~1916년),주33) 덴버대학과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을 다녔던 이관영주34) 역시 1913년 일리노이 약대에 입학하여 3년간의 교육과정과 1916년 여름 현장 학업까지 마쳤다.주35) 9) 대학생 이관영은 대한인북미유학생회(The Korean Student’s Alliance of U.S.A, 1913년 6월 4일~1916년 말, 초대 회장은 박처후)가 연 2회 발간하는 북미유학생영문보(The Korean Student’s Review) 편집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주36)
일리노이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은 1859년 9월 12일에 개교한 시카고 약학대학(Chicago College of Pharmacy)인데, 1896년 일리노이대학교 통합안에 따라 일리노이대학교 약학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주37) 시카고 소재 일리노이대학교 약학대학은(흔히 일리노이 시카고 약대라 부름) 1884년부터 2년제 교육 프로그램과 3년제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였는데 2년제의 과정 이수자에게는 약학사(Pharmacy Graduate, Pharm. G)’를 주고, 3년제의 약학·화학(Pharmaceutical Chemistry)의 과정을 이수하면 ‘약학·화학의 복학 학위(Pharmacy. Chemistry)’를 수여하였다. 학업 내용과 연한에 따라 학위의 명칭이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약제사의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소지한 자격증에 따라 참여할 수 있는 약업 활동의 양상에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2년제 약학사는 주로 약국 운영에 치중하였다. 3년제 과정을 마쳐 1916년에 약학·화학(Pharm·Chem.)학위를 받은 이관영은 약제사, 화학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시카고에서 의과대학을 나와 미국 의사가 된 그의 종숙 이희경은 졸업하자마자 하와이 호노룰루 1323 Fort St.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는데,주38) 약학·화학(Pharm·Chem.) 학위를 받은 이관영 역시 하와이로 가서 하와이 제당연합회 연구부 화학실에서 연구원이 되었다.주39) 이관영은 일리노이 약학대학 동창회 명부에 ‘Young Rey’로 기재되어 있다(Fig. 1).주40) 9) 이희경의 병원 주소와 이관영의 일리노이 동창회 명부의 주소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같은 집에서 생활한 것 같다.
넓은 세상에서 선진의 문물을 습득하여 조선의 개화에 공헌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미국행에 오른 21세의 청년 이관영은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십수 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1918년 1월 말~2월 초에 귀국했다.주41) 그가 돌아온 곳은 떠날 때의 대한제국이 아니고 일본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 조선이었다.
『매일신보』는「제약화학의 효시」란 제목으로 최근 미국에서 귀국한 이관영을 소개하고 있다(Fig. 2). ‘수월 전 북미합중국으로부터 귀국한 의학사 이희경(李喜儆) 씨의 종질(從姪) 이관영(李觀泳, 기사에는 李觀永으로 오기)씨가 또 일전에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였는데 씨 역시 평안남도 순천군 출생으로 거금(지금부터) 14년 전에 그의 종숙 이희경(李喜儆)씨와 동왕(함께) 미국에 가서 다년간 신산을 맛보며 市可高(시카고)관립대학교에서 무기화학(無機化學), 유기화학(有機化學), 정질분석화학(定質分析化學), 응용화학(應用化學), 생리화학(生理化學), 생리학(生理學), 신체해부학(身體解剖學), 약학(藥性, 藥種 및 藥種 栽培法, 眞假分析法, 調劑法, 服用法), 위생학(衛生學), 미균학(黴菌學), 현미기(顯微機 應用法, 使用法), 제약화학 특용(製藥化學特用)의 수학과(數學科) 등을 졸업하고 布哇(하와이) 제당연합회(製糖聯合會) 연구부 화학과에서 분석에 종사하여 성적이 양호한 결과 금반 학사의 위(位)를 득하고 귀국하야 총독부의 면허를 얻고자 청원을 신청하였는데 씨의 배운 바는 우리 조선인의 효시이라더라’(괄호 안에 이태릭체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저자가 표기한 것입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이관영의 귀국 시점은 1917년 말이나 1918년 초가 아닐까 싶으며 종질 이희경과 시차를 두고 귀국했음을 알 수 있다.
귀국 후 얼마 안 있어 이관영은 조선총독부에 약제사면허를 신청하였는데, 미국 일리노이 약학대학에서의 수학한 학력을 인정받아 시험 없이 조선약제사면허(제13호, 1918년 4월 18일)주42)를 받았다(Figs. 3, 4). 이관영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약제사면허를 받은 첫 번째 한국인으로 기록되었고 당시 약제사면허를 소유한 유일의 조선인이었다.주43) 이는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사립 도쿄약학교 출신으로 대한제국에서 약제관으로 활동했던 유세환은 한일병탄 이후 관직을 떠나 종로 3가에서 1917년 1월 타계할 때까지 인수당약국을 했다. 유세환이 도쿄약학교에서 2년간 약학교육을 받아 약포 운영 자격은 분명 갖고 있었으나 조제권을 보장하는 약제사면허를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은 기록은 없다. 이관영보다 일 년 뒤, 서양에서 약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는 캐나다 약제사 및 의사면허를 보유한 에비슨(Avison, Oliver R., 1860~1956년)도 조선약제사 면허(제19호)를 받았는데,주44) 그는 서구인으로 첫 번째 조선 약제사면허 보유자가 된 것이다. 에비슨은 1894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제중원의 운영 책임을 맡았는데 1900년 초에 제중원을 세브란스의학교로 발전시켜 교장직을 수행했다.주45) 10)
조선 약제사면허를 취득한 이관영이 몇 년 동안 고향인 평안남도 순천, 평양 지역에서 청소년을 위한 교육에 관여한 것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조선일보』1921년 4월 2일 자에는 ‘순천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노동자를 위한 중등 정도의 야학을 개최하고 법제, 경제, 영어 등을 교수하는데 강사로 이관영(李觀泳), 차종호(車宗鎬)였드라’라는 짧막한 기사가 있다.주47)『동아일보』 1922년 7월 6일 자에는 평남유림연합회의 간부들이 경비를 부담하고 설립한 대성학관(大成學館)에 대한 속보(續報)가 실렸다.주48) 대성학관은 중등 과정의 학과교수(學科敎授)를 목적으로 하는데 강사로 김창하(金昌河), 이관영(李觀泳), 노춘권(盧春權), 최재학(崔在學) 등이 전담하기로 했다. 1년 후인 1923년 7을 초순의 동아일보』에는 이관영이 고학생들의 기금 마련을 위하여 공연하는 소극(素劇)을 관람하고 후원금을 내었다는 기사도 있다.주49) 이런 신문 기사에 근거하여 이관영이 고향에서 중등교육 활동에 관여하며 청소년 후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나, 약제사로 활동하였다는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가 고향에 머물며 교육 활동을 하는 동안 미국에서 십 수년간을 서로 의지하며 생활했던 그의 종숙 이희경은 귀국한 지 1년 만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주50) 따라서 고향에서의 이관영의 일상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 운신(運身)이 편치 않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시카고 캠퍼스 약학대학에서 제약·화학을 전공한 이관영이 조선 사회에서 약학의 전문지식을 살려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가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대학(이하 세브란스의학 전문) 화학, 약학, 약물학 교실(Chemistry, Pharmacy, Materia & Medica)에 부교수로 부임하고서부터이다.주51) 11)
당시 세브란스 의학 전문의 화학·약학·약물학 교실에는 미국선교회에서 파견된 약제사 테일러(J.L.R Taylor, 약학사(Pharmacy G, 재임 기간, 1922~1926년)가 교수로 있었다.주52) 12) 약물학 담당 교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관영을 별도로 채용한 것은 그의 학문적 배경 때문으로 보인다. 이관영은 제약과 화학을 모두 전공한 약제사(Pharmacy·Chem.)(53)로 약학, 화학, 약물학에 학문적 토대가 두터웠으며, 오랫동안 미국에서 학업을 쌓고,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으며 영어 구사력을 갖추었기에 미국 선교사가 주 구성원인 교수진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이관영의 채용으로 의학교육의 수준을 고양했을 것으로 사료 된다. 이관영은 1925년부터 병원 약국부(Pharmacy dept)의 부주임(Assistant Chief)을 겸직했다(주임은 테일러 교수였다).주54) 13) 테일러 교수가 세브란스의학교를 사임한 1926년 이후부터 1931년까지 이관영은 화학·약학·약물학 교실의 주임 교수가 되었다(Fig. 5). 1931년부터 차츰 의과대학의 교실 제도가 바뀌어 과거 약물학, 약학 화학교실(Chemistry, Pharmacy, Materia & Medica)이 약리학 교실(Pharmacy and Materia & Medica)와 약제학(Pharmacy)으로 분리되었는데, 화학이 강한 이관영은 화학교실(Chemistry)을 맡았고, 나머지 과목은 약리학 교실 소속으로 배치했다.주55)
이관영은 화학교실의 주임 교수이면서주57) 병원 약국장을 겸직하였다. 1936년 봄에는 세브란스병원이 운영하는 세브란스 의용품상회의 총지배인이 되었다.주58) 세브란스 의용품상회는 세브란스의학전문의 에비슨, 윤치왕(尹致旺), 오긍선(吳兢善) 등이 주주(株主)가 되어 1934년에 설립한 의약품 공급회사이다. 서울 역전에 있던 의용품상회의 업무는 세브란스병원의 원내 처방약품의 조달이 우선적 주요 임무지만, 조선 내 여러 곳에 있는 기독계 선교 병·의원에 의약용품을 공급하는 것이다. 한편 의용품상회 안에 제약부(製藥部)를 두고 대황중조합제(大黃重曹合劑) 같은 약품을 제조하여 조선 반도 여러 지역에 있는 기독 계통의 병·의원이나 국내 소매 약국에 판매하였다.주59) 1) 따라서 이관영은 화학 교수로, 병원 약국 책임자로, 제약 및 약품판매 유통업자로 활약하였던 것이다.
이관영이 미국에서 귀국할 무렵인 1918년 초에 한반도에는 대학 수준의 약학교육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없었다. 1915년 6월에 조선약업자의 친목단체인 조선약업총합소(1910년 9월에 조직)가 비용을 대기로 하고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약업인의 관심과 협조로 1년 교육 연한의 약학강습소(소장 조중응, 趙重應, 1860~1919년)를 개소한 후,주60) 조선인, 일인을 불문하고 지원자를 받아 야간(오후 6~9시, 3시간)에 장교동 장훈학교의 교실을 빌려 약학교육을 진행하였다. 1916년부터 1918년 봄까지 3회에 걸쳐 매년 한국인 50명, 일본인 30~40명의 수료자를 배출하였는데,주61) 강습소 수료자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1916년부터 매년 시행하는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주62) 이에 조선사회가 요구하는 약제사 양성이라는 조선약학강습소의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미흡하다고 평가되어, 약학강습소를 자진하여 폐소하고 보다 충실한 약학교육으로 약제사 배출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2년제 ‘조선약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8년 6월 1일에 조증응은 조선인 약업자, 일본인 약업자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고지마(兒島高里) 약제사, 조선총독부의원 약제과장 요시키(吉木彌三) 등 일본인 약제사와의 협력으로 조선약학교의 설립 인가를 총독부로부터 얻었고, 드디어 1918년 6월 18일에 조선약학교를 개교하였다. 설립에 필요한 비용은 일본과 조선 유지들에게서 모금하여 충당했다.주63) 한편 총독부는 조선약학교의 경상비로 매년 3천 원의 교육보조금을 약속했다.주64) 조선약학교의 이사로 이동선(李東善), 아라이(新井虎太郞), 야마기시(山岸祐太郎), 고우죠(古城龜之助)가 선임되었는데, 조선 약업자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약학강습소와는 달리 조선약학교의 운영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있었다.주65) 조선인, 일본인, 남·녀 차별 없이 모두 조선약학교에 입학이 가능하나 교수진은 모두 일본인이고, 수업을 일본어로 진행하여 일본어가 익숙지 않으면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듯 2년제 조선약학교 개교 작업이 논의가 진행될 즈음인 1918년 초에 일본 식민지가 된 조선에 돌아온 이관영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약 제사면허를 교부받았지만(1918년 4월 18일), 약학도, 약업자로 활동하지 않고 평안남도 순천으로 귀향했던 것이다.
이관영이 순천, 평양에서 중등교육에 헌신하는 동안 조선약학교 제1회 졸업생 이호벽(李鎬壁)과 신경휴(申敬休)가 1920년 11월 시행된 조선총독부 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1921년 봄에 약제사면허를 취득하였다.주66) 1921년 약제사 시험에는 조선약학교 졸업생 이중규(李仲珪)와 이정재(李楨宰)가, 1922년에는 조선약학강습소 수료자 황호연(黃虎淵)이 수년간 독학한 후 약제사 시험에 합격함으로 조선인 약제사가 5명이 되었다.주67)
1923년 가을부터 이관영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에서 화학, 약물학 교수로 재직하며 세브란스 병원의 약국에서 약무를 담당하는 동안 조선약학교는 학제가 2년제에서 3년제로 변경되었다. 즉 1918년 개교할 때는 2년제의 교육기관이었으나 1924년 4월부터는 기존의 2년제 과정(1924년 3월에 입학생이 졸업하는 1926년 2월까지 한정적으로 운영하고 이를 특별과로 칭하고 2년제 졸업생을 조약 졸업생으로 부름)과 새로 시작되는 3년제 과정(본과, 본과 졸업생을 조본 졸업생이라 부름)이 함께 운영되었다. 3년제 조선약학교의 교육 내용은 확장되었고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지정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음으로, 3년제 졸업생은 약제사 시험 없이 약학교 졸업장만으로 조선약제사 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약학교 졸업생 김수만(金壽萬, 조선약학교(2년제) 7회, 1926년 졸업)과 한도준(韓道濬, 조선약학교(3년제) 6회, 1929년 졸업)이 이관영 교수가 주임인 세브란스의학교 약물학교실에 조수로 들어와 수년간을 보내면서 약학 지식을 더욱 쌓는 동시에 병원약국의 실무도 익혀 약제사로서의 능력을 고양하였다.주68) 14) 이관영은 1931년 감수자로 김수만과 한도준이『화학기본 선한약물학, 化學基本 鮮漢藥物學』이라는 조선 초유의 한글과 한문이 혼용된 약물학(藥物學)책을 출간하는데 관여하였다(Fig. 6).주69) 『화학기본 선한약물학』은 본서 389쪽, 부록 17쪽과 6쪽의 약물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에는 당시 사용되는 식물성, 광물성, 동물성 약물 522종에 대한 약물 이름을 수록하고 성분, 화학기호가 밝혀진 것은 이를 명기하고, 효능에 대하여 신학설을 제시했다. 부록으로 약품에 대한 법령과 약종영업에 대한 일체서식 및 한약종상시험강본(漢藥種商試驗講本)을 실었다. 김수만은 1934년(소화 9)에 일본어로 된『提要藥物學講義』(272쪽)를 저술했다.주70) 이 책은 제5 개정『일본약국방』의 약품, 약국방 이외에 독·극 약품, 신약제제, 독물 및 극물 품목, 공업용약품, 약품 저장법 일람표, 약제편으로 구성되어있고, 부록(58쪽)에는 「임상처방의 실제」란 제목 아래 109개의 처방이 실려있다. 이두 저서는 당시 약학도 및 약업 종사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관영이 김수만, 한도준의 저술에 얼마만큼 직접적으로 관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관영의 조수였던 김수만, 한도준이었으니 이관영으로부터 학문적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사회인 이관영과 관련된 기사가 동아일보 1939년 6월 29일 6면에 있다.주71) 기사에 의하면 ‘야소회 장로회가 설립한 순천의 정융유치원(靜戎幼稚園)이 경영이 어려워 존폐 길에 방황하였는데 연전 이관영의 부친 이희신(李喜信)이 원장직을 맡아 부단의 노력으로 회생시키고자 하였지만, 이희신 타계(1938년 3월 14일) 후 경영이 더욱 어려운 처지라 이관영(세브란스약용품 상회 지배인, 56세)이 일백 원을 기부’했다고 한다.주72) 그가 부친이 돌보던 고향의 아동 시설이 부친 타계 후 더욱 운영이 어려워지자 경제적 후원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약학인(교수, 약업자 등)로서의 이관영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1939년 6월 이후의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전시체제의 조선총독부는 1938년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를 폐교하는 등주73)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는데,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 전쟁이 발발하자 외국 정부는 조선에 있는 자국민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해군이 조선에 잔류하는 미국 선교사를 강제 퇴출하여 세브란스의학교의 미국인 교수들도 조선을 떠나야 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친미 배경을 지닌 이관영은 어떤 행로를 밟았을까 알아보던 차에『매일신보』1944년 1월 23일 자에 ‘이관영이 1944년 1월 18일에 노환으로 별세하여 1월 21일 평안남도 순천읍 전산리(錢山里) 선영에 안장된다’는 부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주74) 60년의 선구적인 생을 마친 그에게는 외아들, 손자 다섯, 증손 하나가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 상동교회 청년파 소속의 개화 지식인 박장현, 박용만이 서북지방에서 운영하던 시무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약관의 청년 이관영은 1905년 초에 도미하여 우선 미국의 수도 워싱톤으로 향하여 워싱톤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서 미국의 문물을 익혔다. 동년 9월 말에는 그를 뒤따라 도미한 10대 소년 종숙(從叔) 이희경을 워싱톤에서 맞이한 후, 둘은 곧 콜라라도 덴버로 생활지를 옮겼다. 이들은 미국이란 낯선 환경에서 십수년을 서로 의지가 되어 동고동락하면서 대한독립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학업을 닦으며 사회 구성원으로 역량을 키웠다.
그들이 덴버에서 간난의 생활을 시작할 즈음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11월 17일)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이에 청년 이관영은 덴버에서 박용만 등과 더불어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단체를 구성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는 한인소년병학교의 태동으로 이어졌다(1905~1908년). 한일병탄으로 대한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자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에 있는 한인 젊은이들에게 군사훈련과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의식을 고취하며 장차 민족운동을 이끌 인재로 양성하였다(1901~1914년). 이관영과 이희경도 한국소년병학교에서 민족 활동가로서의 역량을 키웠다. 이희경이 네브라스카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을 거쳐 시카고 의대에 진학하자, 이관영 역시 시카고로 옮겨가서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시카고 약학대학에 진학하였고 3년의 과정을 이수하여 약학사·화학사가 되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약학사·화학사가 된 것이다. 선진 학문을 습득한 그들은 학업을 마치자마자 하와이로 옮겨가서 이희경은 의사로, 이관영은 제당 회사에서 화학부 연구원으로 생활하다가, 둘은 1917년 말~1918년 초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귀국하였다.
이관영이 귀국할 즈음, 조선 반도에는 이관영만큼 서양의 선진 약학에 대한 지식을 구비한 한국인은 없었다. 1900년대 초반에 도쿄약학교에서 일본에 수용된 서양 약학을 수학한 유세환도 이미 작고한 상황에서 이관영은 조선의 약학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귀중한 인재였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조선의 현실은 십수 년 동안 미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활동했던 이관영과 이희경에게 조선인을 위하여 그들의 전문지식을 펼치기에는 상당히 암울한 사회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희경은 1918년 12월에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이에 합류하였다. 그는 의사로 활동하며 상해임시정부의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희경은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의 초대 군무 위원장, 임시정부 외교위원, 의정원 임시회계 검사원(臨時會計檢查員), 외무차장(外務次長) 겸 외무 총장대리(外務總長代理) 등을 역임하면서 독일, 미국 등지에서 대한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35년 10월에 미국제약회사(美國製藥會社) 동양특파원(東洋特派員)으로 가장하여 귀국하는 도중, 요코하마 항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된 뒤 극심하게 조사를 받은 후 석방되었으나, 일제의 고문 여독으로 1941년 그는 순국하였다. 국가보훈처는 1968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같은 이희경의 독립운동 행적은 일본 식민지령인 한반도에 거주하는 이관영의 일상과 활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근대약학을 배운 이관영은 1918년 초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평안도 순천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년간 머물며 청소년 교육에 힘쓰다가, 1923년 가을부터 미국 선교회가 운영하는 세브란스의학전문에 교수로 부임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에서 그는 20년 가까이 의학도들에게 약물학, 약화학, 약제학 등을 가르치면서 의료인력의 양성에 힘쓴 교육자이다. 동시에 세브란스병원 약국장이던 그는 약물의 전문지식으로 동시대의 국민 보건 향상에 공헌했으며, 세브란스 의용품상회 지배인으로 의약품의 유통 및 판매 등 약업의 확장에도 기여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조선의 독립지사들과 대한의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이관영이었기에, 그리고 상해 임시 정부 임정 요인 이희경과의 친연(親緣)이 있었기에 식민지 조선에서의 이관영의 일상은 일제 관헌의 감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관영이 세브란스의학교에서 의학도에게 약물학의 지식을 전수할 시기에 식민지 조선 반도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조선약학교가 있었다. 조선약학교의 교육 인력은 조선총독부에서 약사(藥事)를 담당하던 일본 약제사, 총독부의원 약국엄무 담당자, 또는 주로 경성에서 약업체를 경영하던 자들로 이들은 본업과 병행하여 조선약학교에서 학생 교육을 겸직했었다.주75) 따라서 조선약학교에 이관영 같은 교육에만 매진할 수 있는 인재가 절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관영이 처한 시대적 환경, 유학 시절의 활동상, 교육과정, 집안 및 개인적 성향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 학생이 우점하며 일본어로 교육해야 하는 조선약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에는 이관영 자신이나 조선약학교 측 모두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근대적 서양 약학교육(제약·화학)을 받은 이관영은 세브란스의학교에서 의사 양성에 필요한 기초과목인 약물학, 화학, 약제학을 교수하고, 병원 약국장과 의용품 상회 지배인으로서 맡은 업무가 막중하기에 별도로 전문 약학도에게 고도의 전문지식을 전수할 시간 또한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한편 우수한 영어 구사 능력으로 세브란스의학교에서 교수로 의용품상회 지배인으로 활약했던 이관영이 구태여 일본어 습득의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다양한 요소가 그로 하여금 일본어 전용 정책을 쓰는 조선약학교와는 거리를 두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다시 말해 이관영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조선약학교의 교육에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은 듯싶다. 따라서 그의 선진 약학 지식은 조선반도에서 약학교육 제도를 통한 약학 전문인을 양성 교육에는 큰 기여가 되지 못했다. 서양의 선진 약학을 학습한 약제사 이관영의 역할이 한국에서 전개되기 시작하는 약학의 발전을 위하여 절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소에서 활동을 펼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자못 아쉽다.
하지만 그가 주임인 세브란스의학교 약물학과 교실에서 조수(助手)로 일했던 조선약학교 출신의 젊은 약학도들이『화학기본 약물학』을 간행하는데 있어, 그가 감수를 맡은 것은 한국의약학 교육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화학기본 약물학』은 한국인이 최초로 펴낸 근대적 약학 관련 저서이다. 이 책은 당시 한약종상의 자격을 얻는데 필요한 학술정보를 담은 책으로 높이 평가받았으며 약학교에서 강의 교재로 활용되었는데, 이러한 평가에는 이관영의 역할과 위상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제사 이관영의 활동을 논의할 때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관영이 일제 식민 통치에서 의료인 양성에 참여하여 한국의료계의 발전에 기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교육을 받은 의료인이 아니어서인지 의학계에서는 그의 활동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양약학을 공부하고 미국 약제사면허를 얻은 이관영에 관심이 있어 그의 삶을 추적하였다. 오늘날 한국 약학계는 그를 일제강점기에 미국선교단체가 운영하는 의학 교육기관에서 안일한 생활을 하며 한국의 약학교육에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주76) 1) 따라서 이관영은 양쪽 학계에서 기억되지 않는 경계인으로 남아 있다. 약제사가 되기까지 이관영이 걸었던 길과 일제식민기에서 약학도, 약제사로서의 그의 활동을 살펴본 이 글이 한국 근대의·약학(醫·藥學) 역사를 논할 때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약제사 이관영을 기억하고 소환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의 이관영 모습을 담은 사진을 논문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과 이관영이 감수하고 김수만이 저술한『선한약물학』의 사진을 촬영하도록 허락해준 서울대학교 약학역사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 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윤5월 18일, 修信使金綺秀以"四月二十九日, 自釜山浦發船, 五月初七日到東京, 駐遠遼館二十餘日。同月二十七日, 離發東京, 閏五月初七日辰時, 還泊釜山浦。日本外務卿答書契及公文一度, 譯漢文一度, 上送于該曹堂上, 譯官玄昔運, 落留任所。" 啓。
2) 김승태,「日本을 통한 西洋醫學의 受容과 그 성격」, 『國史館論叢』 第6輯, 1989, 227~228쪽.
3) 김승태,「일본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신편 한국사』, 46, 2002, 281~282쪽.
4) 박윤재,「1876~1904년 일본 관립병원의 설립과 활동에 관한 연구」, 『역사와 현실』, 42, 2005.
5) 서용태,「1877년 釜山 濟生醫院의 설립과 그 의의」,『지역과 역사』, 28, 2011.
6) 개원 첫해인 1877년 2월~12월의 환자 총수는 6,346명으로, 일본인이 3,813명, 조선인이 2,533명이었다. 1880년 1월~12월에는 일본인 2,998명, 조선인 729명, 1881년 1월~12월에는 일본인 2,838명, 조선인 675명, 1883년 4월~1884년 3월에는 일본인 1,235명, 조선인 843명, 1884년 4월~1885년 3월에는 일본인 1078명, 조선인 521명이었다. 이는 서용태의 논문, 262쪽의 <표-1>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부산 제생병원은 1885년 4월 30일자로 폐지되고 대신 민단이 경영하는 공립병원이 되었다. 공립병원이 되면서 약국장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초대 약국장으로는 도쿄대학에서 약학강습을 받고 시모야먀(下山順一郞) 교수의 조수로 있던 27세의 유미스리(弓削龍藏, 일본 약제사면허증 제2호 보유)가 초대 약국장으로 부임했다(홍현오 1972,『한국약업사』, 157~158쪽).
7) 연세대학교 의사학연구소 엮음,『제중원 130년과 근대의학』역사공간, 2016, 18쪽, 37~38쪽; H. W. Allen, 김원모 역,『The Allen Diary,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318~319쪽. 알렌은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출생으로 1883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소재한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188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의하여 중국 남경에 파송되었으나(1883년 10월 15일 남경 도착), 중국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1년을 보내다가 선교 임지를 조선으로 바꾸어 1884년 9월 20일 단신으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의 선교를 불허하였기에 알렌은 미공사관의 전속 의사 신분으로 활동했다.
8) 박형우·박윤재,『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 2010, 사이언스북스.
9) 박형우 편역,『호러스 N. 알렌 자료집 II. 1884~1885』2020, 220~234쪽.『호러스 N. 알렌 자료집 III. 1886』, 2020, 134~143쪽.
10) 여인석, 김성수, 김영수, 박윤재, 신규환, 이병훈, 이현숙,「양약을 받아드려 신약을 만들다」, 『약의 인문학』, 2022, 230쪽.
11) 이영남,「1950년대 의약품의 신문광고와 여성 의약 문화」,『약학사회지』, 5, 2022, 6~7쪽.
12) 의약품과 약품은 일반적으로 정의상 별 차이가 없지만, 의약품은 포괄적 개념, 약품은 개별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영남, 2022,「1950년대 의약품의 신문광고와 여성 의약 문화」,『약학사회지』, 5, 1쪽. 의학에서는 약이 되는 물질이란 의미의 ‘약물’로 부르기도 한다 (예, 약물학).
13) 약과 관련된 제반 업무, 즉 약사(藥事)의 전문가는 약에 관한 지식을 정규 교육을 통하여 습득하고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아야 하는데, 약의 전문가를 약제사, 또는 약사라 한다. ‘약제사’란 명칭은 개항 이후 도입되어 일제강점기에 사용되었다. 1953년 12월에 대한민국의 <약사법>이 개정되면서 ‘약제사’란 명칭을 ‘약사’로 바뀌었다. 주승재·주경식,「한국 약사제도의 변천」,『약학회지』 58, 2014, 407~408쪽; 이영남,「약제사 이을호의 활동」,『약학사회지』 1, 2018, 4쪽.
14) 서양에서 시작된 근대약학의 개념, 특성이나 함의는 다각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근대 약학의 특성으로 언급된 것들은 Lydia Mez-Mangold의 저서인『A history of Pharmacy』(F. Hoffman-La Roche & Co., Ltd., Basel, Switzerland, 1971)의 내용을 발췌·축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15) 『고종시대사』 5집, 광무 4년(1900) 1월 2일, 내부령 제27호, 의사규칙·약제사 규칙·약종상 규칙을 시행함.
16) (사) 한국약학교육협의 발간, 2017,『한국약학사』, 50쪽.
17) 토쿄약학교(東京藥學校)는 1880년(명치13) 문부성의 관리며 의사였던 의사 藤田正方이 약포주(藥舖主)를 양성하기 위하여 자택에서 문을 연 2년제 도쿄약포학교의 후신이다. 도쿄약포학교는 1883년(명치 16) 神田로 이전하면서 도쿄(東京)약학교로 개칭했다. 1888년 설립자가 병몰(病沒)하면서 동경대학교 약학과 교수인 下山純一郞과 丹波敬三이 각기 교장과 감사로 학교 운영에 참여하였고 곧 약학강습소와 병합하여 사립 도쿄약학교(동경약학교)가 되었다. 당시 일본의 사립 약학교들은 2년제 교육기관으로 약포주 교육에 치중했다. 도쿄약학교는 1917년에 도쿄(동경)약학전문학교가 되었다. 1929년에 개교한 上野여자약학대학(1931년에 동경약학전문학교여자부로 개칭)과 1949년에 병합하여 동경약학대학(東京藥大)으로 승격하여 현재에 이른다. 일본약학사편,「동경약학대학 약학과의 역사」,『약학사사전』2016, 58~59쪽, 796쪽, 804쪽.
18) 김은신,『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 295~297쪽;『엔싸이버 백과사전』, 「유세환」. 2008년 9월 27일에 확인함.
19)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개정판,『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2017, 66쪽.
20) 『조선총독부 관보』호외 1, 1912년 3월 28일「약품급약품영업취제령, 명치 14년, 법률 제30호」
21) 『조선총독부 관보』제99호, 1912년 1월 28일,「藥劑士免許證下付」. 조선총독부는 경성에 사는 阿部行雄에게 약제사면허 제1호, 평안남도 평양에 주소를 둔 猪狩擘에게 약제사면허 제2호를 내어 주었다. 조선약제사 면허를 받은 이들은 일본에서 이미 소정의 약학교육을 이수한 사람이다.
22) 『조선총독부 관보』제1101호, 1916년 4월 8일; 제1230호, 1916년 9월 7일; 제1294호, 1916년 11월 27일.
23) 홍현오,「초창기의 약종상」,『한국약업사』, 1972, 28~29쪽. 2년간 약학 수업을 받은 사람은 약종상 자격이 부여되었다.
24) 1920년 5월, 조선약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이호벽과 신경휴가 1920년 11월에 시행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각기 1921년 3월과 5월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 약제사면허(이호벽, 제 26호, 신경휴, 제 28호)를 받았다.
25) 이관영의 본적은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서변리(西邊里) 75번지이다. 거주지 주소(1918년경)는 경기도 경성부 다옥정 190번지, 1925년경에는 경성부 다옥정 38번지이다.
26) 시무학교는 박장현(일명 박희병, 朴羲秉, 1871~1907년, 강원도 철원 출신), 조카 박용만과 평안도 인근 지역의 유지가 세운 사립학교로 젊은이들에게 신학문과 서양 사상을 전파하였다. 박장현은 1895~1896년 5월까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했다. 1896~1897년 버지니아주 살렘(Salem)에 있는 로아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평북 운산(雲山)광산의 통역으로 일하며 지방 유지들과 손잡고 시무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과 서양의 신사상을 가르쳤다. 1900년에 다시 미국에 다녀왔다. 1905년 8월 상동청년회의 사업으로 멕시코에 한인 노동자 실태를 조사하러 갔으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자, 멕시코 한인 노동자를 위한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그는 1906년 1월 미국 콜로라도에 정착했다. 박희병은 콜로라도 덴버 지역의 한인사회의 구심이 되어 윤병구, 박용만과 함께 1907년 한국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가 타계했다.
27) 「二千萬同胞의 感情」『황성신문』1905년 7월 22일(2면), 미국 유학생 이관영이「二千萬同胞의 感情」이란 제목으로 워싱톤에서 1905년 6월 14일 쓴 글을 기고하였다.
28) 이희경(李喜儆, 1890~1941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출신이다. 1905년에 미국에 건너가 1911년 일리노이 의과대학에서 진학하여 미국 의사(醫師)가 되고, 1917년 하와이에서 병원을 개업하며 독립운동가를 돕다가 1917년 말~1918년 초에 귀국했으나 1918년 12월에 上海로 망명했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조직, 초대 회장(會長)이 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의 초대 군무 위원장(軍務委員長), 임시정부 외교위원, 의정원의 임시회계 검사원(臨時會計檢查員), 외무차장(外務次長) 겸 외무 총장대리(外務總長代理) 등을 역임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29) 안형주,『 박용만과 한인 소년병학교』, 지식산업사, 2007, 162쪽.
30)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미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을 저격한 의거를 계기로 구성된 재미 한인 단체 통합운동의 산물이며, 후에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조국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재미한인 오십년사』, 김원용, 캘리포니아, 1959;『재미한인 오십년사』, 김원용 지음, 손보기 엮음, 2004.
31) 박용만(朴容萬, 1881~1928년)은 철원 출신으로 호는 우성(宇醒)이다. 고아인 박용만을 숙부인 박장현이 양육하였다. 1905년 2월 미국에 도착한 박용만은 같은 해 9월에 미국에 도착한 숙부 박장현을 따라 콜로라도로 갔다. 그는 네브래스카주(Nebraska 州)에 있는 링컨고등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08년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에서 수학,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 편입하여 1912년 졸업했다. 그는 네브라스카의 커니(Kearney)농장에서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1909~1914년)를 열었다.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2년 하와이로 가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활약했다.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실시, 130여 명의 독립전쟁 인원을 확보했다. 박용만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1919년 4월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8년 10월 28일, 북경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대본공사 사업을 추진하던 중 이해명의 권총 저격으로 사망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형주,『박용만과 한인 소년병학교』450~452쪽에 부록으로 실린「박용만의 연보」를 참조하여 정리하였다.;「박용만」,『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2) 안형주,『 박용만과 한인 소년병학교』, 158~164쪽, 한국소년병학교의 교사, 후원자, 학생들의 명단이 있다.
33) 『신한민보』, 1916년 6월 15일 기사「이희경 씨의 의학 졸업, 하와이로 가는 길」
34) 『The Year Book of School of Pharmacy Alumni, University of Illinois, 1915』, 417쪽의 정보를 인용했다.
35) 「이관영 씨 제약업을 필업」,『신한민보』, 1916년 10월 5일.「이관영 씨 제약업을 필업」신문기사에는 이관하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이관영의 오기이다.;「일리노이 관립학교 졸업생 이관영」,『신한민보』, 1916년 6월 22일.
36) 『북미유학생 영문보』는 1914년부터 매년 6월과 12월, 연 2회 발간되었다. 영문보의 편집인으로 이노익, 김호연, 김현구, 이관영, 정한영, 신형호, 김일신 등이 활동했다(안형주,『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원용 지음, 손보기 엮음,「미주 유학생『재미한인 오십년사』2004, 혜안).
37) 시카고 약대는 1896년 일리노이대학교 통합안에 따라 5월 1일에 시카고 일리노이대학교 약학교가 되었다(Univ. of Illinois at Chicago, School of Pharmacy). The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School of Pharmacy (https://www:uic.edu)에서 발췌.
38) 안형주, 2007,『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376~378쪽, <그림 104> 미국 의사면허를 지닌 이희경은 1917년 하와이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는데 그가 미국 켈리포니아 로스안젤러스에 있는 도산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봉투에 ‘한국인 의사 이희경(Dr. H. K. Rey)이라 표기되었다.
39) 『매일신보』191년 2월 11일(2면) 기사「제약화학의 효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개정판『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66쪽.
40) 『The Year Book of School of Pharmacy Alumni, University of Illinois, 1915』, 417쪽; 안형주,『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378쪽(각주 38 참조). 따라서 이관영과 이희경은 한국성 ‘이(李)’를 ‘Rey로 표기하였다고 여겨진다.
41) 「제약화학의 효시」, 『매일신보』191년 2월 11일(2면)
42) 「약제사면허증 하부」,『조선총독부 관보』제1707호, 1918년 4월 18일.
43)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에 거주하는 2명의 일본인에게 조선약제사 면허를 하부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제99호, 1912년 1월 28일). 1916년에 4명(『조선총독부관보』제1101호, 제 1230호, 제 1294호), 1917년에 5명에게 약제사 면허를 주었다(『조선총독부관보』제1365호, 제1387호, 제1467호, 제1523호). 면허를 받은 사람은 모두 조선에 주소를 둔 일본인이었다. 1918년 2월 충북 청주에 주소를 둔 靑木正雄이 조선약제사 제12호를 받았고(『조선총독부관보』제1658호 1918년 2월 18일), 이관영은 1918년 4월18일에 제13호 약제사면허를 받았다.
(44) 『조선총독부 관보』정규호 1962호(1919년 2월 17일).
45) 이광린,『올리버 알 에비슨의 생애-한국 근대 서양의학과 근대교육의 개척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2, 196~203쪽; 이만열,「제중원과 에비슨」,『연세의사학』18, 2015, 49~63쪽; 박형우 편역, 『올리버 R. 에비슨 자료집 I(1860~1892), -에비슨의 집안, 교육 및 사회배경-』,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5.
46) 사진 출처: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1929년 졸업앨범(동은의학박물관 제공)
47) 『조선일보』 1921년 4월 2일,「순천에 中等夜學」
48) 『동아일보』1922년 7월 6일,「大成學館設立續報」
49) 『동아일보 1923년 7월 5일.「苦學生 素劇 第二日」
50) 1919년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조직, 초대 회장(會長)이 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議政院)의 초대 군무 위원장(軍務委員長), 임시정부 외교위원, 의정원의 임시 회계 검사원(臨時會計檢查員), 외무차장(外務次長) 겸 외무 총장대리(外務總長代理) 등을 역임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51) 『The Cooperating Board for Christian Education in Chosun』4쪽; 세브란스의학교 기록에는 1924년 기록부터 이관영의 이름이 보이나 실제 부임은 전해인 1923년 일 수 있다. 이관영이 소속했던 연세의대 약리학 교실(약물학교실의 후신)의 역사기록물에 의하면 이관영은 1923년부터 강의에 참여하였다.
52) 『1923~1924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연례보고서』,『192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일람』
53) 일리노이 약대에는 2년의 약학 과정을 이수한 학생에게는 ‘대학졸업 약제사(Pharm. G)’ 학위를, 3년의 제약·화학(Pharmaceutical Chemistry)과정을 이수한 자에게 ‘제약사 화학자(Pharm·Chem)’를 수여했다. 이관영은 3년 과정을 마쳐 Bachelor of Pharmacy· Chemistry를 받았다.
54) 『1925~26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일람』
55) 세수회, 연세대학교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연세대학교의과대학 약리학교실 60년사(1935~1995)』, 1995.
56) 사진의 출처: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1936년 졸업앨범(동은의학박물관 제공)
57) 『1931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일람』
58) 「이관영 씨(주식회사 세부란스의용품상회 지배인) 신임인사차 본사 방문」,『동아일보』, 1936년 3월 26일; 같은 날, 같은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에도 실렸다; 상업등기,『株式會社セブランス商會 金光準, 周基貞, 이관영」,『조선총독부 관보』정규호 제 3572호(1938년 12월 14일)
59) 홍현오, 1972,「天一, 세브란스, 宮部藥房」,『韓國藥業史』한독약품공업주식회사. 148쪽, 150쪽.
60) 『매일신보』, 1915년 6월 16일,「약학강습소개교식」;『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개정판, 28쪽.
61) 『부산일보』, 1918년 4월 20일,「조선약학교 설립, 경성유지에서」
62) 『매일신보』1916년 10월 25일,「약제사시험 합격자」;『조선총독부 관보』제1571호(1917년10월 24일);『조선총독부 관보』제1872호(1918년 11월 4일)
63) 『매일신보』, 1918년 4월 19일; 1918년 5월 21일; 1918년 6월 5일.
(64) 『부산일보』 1918년 4월 20일.
65) 『매일경제』, 1982년 8월 22일;「재계산맥(655), 근세 100년 산업과 인물」
66) 이호벽과 신경휴의 약제사면허는 각기 제25호(1921년 3월 9일)와 제28호(1921년 5월 10일)이다.『조선총독부 관보』, 정규호 제 2595(1921년 3월 9일); 정규호 2647(1921년 5월 10일)
67)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개정판, 64쪽.
68) 『1931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일람』
69) 이관영 감수, 한도준, 김수만 공편,『化學基本 鮮漢藥物學』경성행림서원, 1931; 『화학기본 선한약물학』의 원본은 서울대학교 약학박물관이 수장하고 있다.
70) 김수만, 1934,『提要藥物學講義』, 경성약학강습소 발행, 1934.
71) 「順川 靜戎幼稚園에 一百圓 寄附, 李觀泳氏의 特志」,『동아일보』, 1939년 6월 29일.
72) 1939년 6월 29일 경성미(3등) 한 석(160 kg)의 시세가 36.40원이었다(동아일보 물가란). 따라서 100원이며 대략 쌀 450 kg (5.5가마)를 살 수 있다. 당시의 100원은 오늘날의 쌀값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150만 원이지만, 그 시절에 100원이 지닌 사회적 유용성은 오늘날의 150만 원 보다 월등하였을 것이다.
73) 1938년 3월 18일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 계통의 숭실전문, 숭실학교, 숭의여학교를 폐교하였다.
74) 『매일신보』, 1944년 1월 23일, 3면. 1939년 이후 이관영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던 중에 동은의학박물관의 정용서 선생님이『매일신보』에 이관영의 부고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75) 1918년 6월 조선약학교가 개교할 당시 교장은 조중응이었다. 1919년 8월 조증응이 타계한 후 총독부 관리였던 고지마(兒島高里)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5년 11월까지 교장직을 겸임했다. 고지마가 사임한 다음날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 약무주임이던 쿠니미네(國峰專吉)가 교장직을 승계하여 1938년 5월 사망시까지 직을 수행했다. 쿠니미네 사망 후에는 경성제국대 병원 약국장인 야스모토(安本義久)가 교장에 취임했다(1938년 9월). 교장직뿐만 아니라 학생 수업을 담당하는 인력도 본업과 겸직하는 교수나 강사로 구성되었다(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47쪽, 113쪽).
76) 당대 일류 생활을 한 약학계 인물로 ‘일본계에는 경성제국대학병원 약국장 야스모도(安本義久), 한국계에는 이관영’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홍현오,『韓國藥業史』한독약품공업주식회사, 1972, 150쪽 참조).
모든 저자는 이해 상충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선언한다.
Young Nam Lee: Graduate Student